학회 인맥 등 통해 교수들에게 공동 연구·업무협약 제안
중앙일보 "기술 유출 우려돼도 연구 단계 규제는 모호"

3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 코리아2024'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약 500여곳이 참여해 첨단 반도체 기술을 선보이는 이번 박람회는 다음달 2일 까지이다.
3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 코리아2024'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약 500여곳이 참여해 첨단 반도체 기술을 선보이는 이번 박람회는 다음달 2일 까지이다.

 

중국 대학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 학과의 국내 교수진에 파격적인 혜택을 내걸고 공동 연구를 제안하는 사례가 최근 부쩍 늘어나 핵심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 

또한 해당 분야의 연구가 이뤄지더라도 처벌 관련 규정과 가이드라인이 모호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6일 중앙일보에 따르면 첨단 기술 학과를 운영하는 국내 10여 개 대학을 확인한 결과, 최근 몇 년 새 중국 대학에서 연구 협력을 제안받은 사례가 많았다. 

대학 간 공동 연구나 업무협약(MOU) 체결을 공식 제안하거나, 학회 인맥 등을 통해 교수들에게 다가가는 식의 접촉이 이뤄졌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반도체 연구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1년에 한두 번씩 아는 중국 교수로부터 전화나 e메일로 공동 연구 제안을 꾸준히 받았다. 어느 수준으로 협력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서 연락을 피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계약해 학과를 운영하는 한 대학의 관계자는 "중국 대학이 첨단 기술 관련 학과만 대상으로 MOU를 제안하는 경우가 몇 년 사이 크게 늘었다"고 알렸다.

중국 대학은 거액 연구비 지원을 제시하거나 교류만 하면 연구비뿐 아니라 연구진 월급까지 부담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 액수가 워낙 큰 데다 국가 연구·개발(R&D) 사업보다 지원 절차가 간단해 국내 교수들이 솔깃해질 수도 있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중국에서 제안서를 보내며 좋은 기술이 있으면 50억 원까지 지원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 대학의 이런 행보는 미국의 각종 무역 제재 등으로 '기술 굴기'가 막힌 상황에서 주요 기술 정보를 빼내려는 꼼수로 의심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대학이 상용화 연구를 하진 않지만, 교수 중엔 기업에서 일하거나 기업과 공동 과제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 (대학 연구기관에) 국내 기술 노하우가 집적돼있다"고 밝혔다. 

고려대 디스플레이 관련 학과의 교수도 "산업 기술은 정교한 실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는 특성이 있어 실패한 실험 내용도 공유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 강조했다.

정진우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브리핑 하고 있다.검찰은 기술 유출 범죄가 기업의 생존은 물론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판단에 따라 엄정 대응하기로 했으며, 법원에 양형기준을 높이는 방안을 건의하기로 했다. 또한 양형 자료를 충분히 확보해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범죄수익도 철저히 환수한다는 방침이다. 2022.10.27/뉴스1
정진우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브리핑 하고 있다.검찰은 기술 유출 범죄가 기업의 생존은 물론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판단에 따라 엄정 대응하기로 했으며, 법원에 양형기준을 높이는 방안을 건의하기로 했다. 또한 양형 자료를 충분히 확보해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범죄수익도 철저히 환수한다는 방침이다. 2022.10.27/뉴스1

 

대학 간 공동 연구로 기술 유출이 우려되는데도 현행법(부정경쟁방지법 및 산업기술보호법)은 매우 허술한 편이다.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에서 산업기술 관련 국가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하면서 생긴 개발성과물이 외국으로 유출되면 15년 이하 징역 또는 15억 원 이하 벌금을 물리는 규정은 있다. 

하지만 대학 연구 단계에서 개발 중인 기술이 산업기술이나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지 기준이 모호하다.

김서곤 법무법인 로백스 기술보호센터 부센터장은 "대학별로 보안 관리 예산이나 전문 인력이 부족해 개별 연구실 단위에서 보안관리가 이뤄지지 않는 문제점도 있다"며 "공동연구 시작 단계에서 연구성과물의 귀속, 비밀 보호 등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고 가야 추후 발생할 위험에 대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기술의 완성까지 수많은 기초 연구가 선행돼야 하는데, 해외 대학 교류를 무작정 경계할 수도 없는 실정이어서 연구 현장에서는 불명확한 지침 탓에 혼란을 겪기도 한다. 

이병훈 교수는 "기초 연구 단계에선 제약을 덜 두고, 산업 기술에 가까울수록 엄격히 해야 한다"며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기술 유출 교수가 될 수도,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국가 기술을 지키면서 학문 교류를 원활히 하려면 2022년 2월 외국 자본의 연구 지원을 공개하도록 의무화한 미국 행정명령을 참고해 지난해부터 과학기술부·국정원을 중심으로 연구·개발 단계 지침이 마련되고 있다. 

선인경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지속가능혁신정책연구단장은 "연구인력 감소 위기 속에서 연구생태계의 국제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단순히 산업기술 유출을 막자는 규제 관점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연구자를 보호하고 위험을 예방하는 관점에서 연구 안보 인식을 제고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항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연구 보안 전문 조직과 인력 양성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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